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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피광태 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6-10-07 04:13연락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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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식 수필가
밀 먹는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을 말할 때 쌀을 주식으로 하는 이들은 ‘밥 세 끼’란 말을 쓴다. 밥 세 끼를 먹여주는 벼농사가 기간산업이던 시절 농촌에서는 벼 수확이 끝나면 마을 공터에 간이 서커스가 들어왔다. 부채 들고 외줄 타기, 입에서 불 뿜기 같은 볼거리가 끝나면 잠시 회충약 선전을 한 후, 한복에 갓을 쓴 소리꾼이 나와 북 장단에 맞춰 흥부가 한 가락을 뽑았다.
■
「 제비 보기 힘들어 허전한 마음
김산옥의 제비 판소리 듣고 달래
갈증 가셨으니 제비만 와준다면
」
그 후 언제든 볼 수 있을 것만 같던 서커스도 소리꾼도 희미한 기억 속에 머물다 이내 잊혔다. 추억이 된 소리꾼의 흥부가 가사가 다시 떠오른 것은 ‘다음 역은 남태령’이란 지하철 안내방송 덕분이었다. 혹시 안내에 나오는 남태령이 흥부가에 나오는 그 남태령일까? 남태령역 안내방송이야 오다가다 더러 들었겠지만, 유독 흥부가를 연상시킨 것은 그 날 과천 호수 위로 솟구치다 미끄러지듯 물 위를 훑는 제비들을 봐서인지 모른다.
귀가 후 흥부가의 ‘제비노정기’를 영상으로 찾아보았다. ‘제비노정기’는 부러진 다리를 흥부에게 치료받은 제비가 보은의 박씨를 물고 날아오는 이야기다. 중국 양자강 남쪽 명승지를 노래하다 압록강을 건넌 후, 평양 부벽루, 개성 만월대를 거쳐 한양 삼각산에서 한숨 쉬다 청파, 애고개, 남태령을 넘어 남원으로 가 마음 졸이던 흥부와 해후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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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농부들은 제비가 멀고 먼 강남에서 다시 찾아와 새끼를 부화하는 모습을 보며 열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자신들의 고단한 처지를 생각하고는 조류와 포유류 간 종의 한계를 넘는 동질감을 느끼며 삶의 고단함을 달랬다.
그럼 제비는 어떤 이유로 인간의 집에 둥지를 틀게 되었을까? 해묵은 간행물이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몸무게가 30g이 될까 말까 한 제비에게는 남모를 걱정거리가 있다. 바로 뻐꾸기의 탁란(托卵)이다. 몸집 큰 뻐꾸기가 제비 둥지에 알을 낳으면, 먼저 부화한 뻐꾸기 새끼가 제비 알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 떨어뜨린다. 제비는 까치·까마귀의 공격과 뱀의 습격까지 피하려면 아예 인간이 사는 초가집 처마에 반(半) 사발 모양의 둥지를 짓고 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제비와 공생하게 된 인간들은 제비가 음력 삼월 삼짇날 왔다 구월 구일에 떠나는 것을 보며 봄이 오고 가을이 끝나가는 것을 알았다. 제비와 정이든 인간은 매끈하게 잘 빠진 제비를 보고 ‘물 찬 제비’나 ‘연미복(燕尾服)’ 같은 말도 지어냈다.
인간과 한집에서 살던 제비가 요즘 좀체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인간이나 제비나 어디에 있든 식(食)과 주(住)가 기본이다. 제비의 입장에서 보면 고단한 몸으로 먼 길을 날아왔지만 먹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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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비가 늘 먹었던 잠자리나 애벌레도 귀해졌다. 굶주린 제비가 벌레를 먹으면 오염된 땅에서 벌레 몸속으로 들어간 독 성분을 섭취하게 된다. 그 독이 제비의 몸속에 쌓이면 알을 낳아도 껍질이 너무 얇아져 제대로 부화하기 어렵다. 게다가 제비가 잠자고 새끼를 키워야 할 둥지를 지을 논흙마저 오염되다 보니 제비로서는 새끼를 키울 엄두조차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제비인들 더 이상 오고 싶을까.
더 많은 수확을 위해 뿌리는 농약이 제비를 정떨어지게 만들고, 우리도 알게 모르게 병들게 한다는 .을 생각하면, 그 시절 제비 다리를 부러뜨렸던 놀부의 악행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어릴 적 흥부의 선행과 놀부의 악행을 통해 권선징악을 배운 우리는 선이 결국 악을 이기리라 믿지만, 악이 오히려 선을 누르고 득세하는 걸 보면 속이 상한다. 그럴 때 듣는 음악이 판소리 흥부가의 ‘제비노정기’다. 어릴 적 한복에 갓을 쓴 소리꾼이 달관한 듯 느릿하게 부르던 ‘제비노정기’가 새로운 스타일로 무대에 오른 것을 보았다. 신세대 국악인 김산옥은 작은북 대신 관현악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손에 쥔 부채를 좌르르 폈다 딱 접으며 소리를 한다. 박이 갈라지는 자진모리 대목에서 흥부의 한(恨)은 순간 흥(興)으로 바뀐다. 내년에 박씨를 물고 다시 찾아올 제비의 생(生)과 동(動), 그리고 힘(力)이 몰려온다. 복이 박씨처럼 때구르르 굴러온다. 새로운 K뮤직의 출현이다.
이제 제비만 돌아오면 된다.
곽정식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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